그리운 향취가 허공을 채웠다. 왠지는 모르겠으나 그립다고 생각했다. 단 7일, 7일의 만남이었을 뿐인데도 말이다. 눈앞의 상대는 마치 프로파일러라도 된 것처럼 상체를 잔뜩 기울인 채 이렇게 물었다.
“혹시….”
“죽어 마땅한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 물음에 맞은 편에 앉아있던 에시타는 이렇게 답했다.
“글쎄요, 세상 어딘가엔 있겠죠. 이미 사형대에 오른 사람도 있겠고요.”
그녀는 자신에게 물음을 던진 이와 같은 미소를 그리며 덧붙였다.
“하지만 살아 돌아온 걸 봐선 그 사람이 죽어 마땅한 사람은 아니었나 봐요.”
예상대로라는 듯 어깨가 가볍게 으쓱였다. 내가 확신하지 않는다고 했지, 예측이 정확하지 않다는 말은 하지 않았잖아요? 자신 있는 표정은 그리 말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게, 그를 사형대에서 내린 건 그녀였다.
한 걸음 더 나아가면 죽음을 맞이했을 그들이었다. 그런 끔찍한 상황에서 벗어난 지 단 하루도 채 되지 않은 상태였으나 신기하게도, 둘 중 누구도 마음이 편치 않은 사람은 없었다. 빗소리도, 조그마한 햇살도, 일절 흘러들어오지 않아 잔인한 침묵만 이어지던 공간이 떠올랐다. 그와 달리 카페 창 사이로 들이 내리는 햇빛은 안도감과 더불어 평온함을 가져다주었다. 어쩌면 그들이 느낄 잔잔한 안정감은 당연했다.
“아쉽게도 한동안 비가 오지 않을 예정인가 봐요.”
평화로운 침묵을 먼저 깬 것은 에시타였다. 카페의 적당한 소음을 음악 삼아 커피잔을 들여다보던 칼이 그 소리를 들었는지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러고 보니 그가 카페에 들어섰을 때, 일기예보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앞으로 날씨가 화창할 것이니 비가 내릴 확률은 현저히 낮다는 내용이었다. 칼은 흠, 소리를 내며 이렇게 말했다.
“사형대에 오를 때, 비가 오지 않은 덕에 우울하진 않았어요. 다만 밖으로 나오는 길엔 날씨가 화창해서 자유로운 느낌은 들지 않더군요. 개운한 느낌도 들지 않고 말입니다.”
에시타는 바람이 섞인 웃음소리를 흘렸다. 자신이 했던 말을 그대로 돌려받으니 상대가 재치있게 느껴지면서도 민망했다.
“당신도 참…. 그보다, 자기소개부터 하죠. 난 에시타에요. E, S, I, T, A.”
그녀는 이전보다 명료하고 정확한 어조로 알파벳을 하나씩 읊어나갔다. 타인에게 흔적을 남기는 행위에 에시타는 상당한 거부감을 느꼈고 또 어색해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이 사람과는 정식으로 이름을 나누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래요, 에시타. 제정신 아닌 사람 만나 심문하기 고생했습니다. 난 칼이에요.”
팔을 주무르며 괜히 창밖을 바라보는 칼이었지만 악수를 먼저 건넨 쪽 역시 칼이었다. 수갑이 풀린 손은 능숙하게 상대방을 향했고, 상대방은 목적지를 헤매지 않고 그 손을 잡아 부드러이 악수했다.
“C로 시작하나요, K로 시작하나요?”
“K로 시작합니다. K, A, R, L.”
“신기하네요. C가 더 어울리는데 말이죠.”
“프로파일러는 얼굴과 어울리는 알파벳도 분석하나요?”
“그럴 리가요. 당신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보고 내 멋대로 말해본 거예요.”
한참 동안 일상적인 대화가 끊임없이 흐르니 자연스레 앞으로의 이야기도 나왔다. 종종 이렇게 만남을 가져도 좋겠다는, 냉소적인 그들답지 않게 꽤 따뜻한 얘기였다. 칼이 명함을 건네주자 에시타는 받아들며 생각했다. 조그만 종이 쪼가리에 그들이 7일간 나눈 모든 대화를 다 적어 내릴 순 없지만, 결국 일주일이 가져다준 결말은 이 인연이 아닐까. 소설로 따지자면 지금 그들은 종장의 마지막 문장을, 혹은 새로운 책의 첫 줄을 적어 내려가고 있었다.
“탐정 사무소를 재개하나요?”
“그래야겠죠. 그쪽은 계속해서 프로파일러 일을 하는 건가요?”
질문을 들은 에시타는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칼은 자신을 심문하던 능력이 아까웠는지 눈썹 한쪽을 살짝 올려 보였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사직서를 냈어요.”
“아주 극단적인데요? 내가 마지막 프로파일링 상대라더니…. 진짜 그만두는 건 아니죠? 어차피 모두 없던 일이 되었잖아요.”
“다들 기억 못 하지만 나는 기억하는 일 아니겠어요? 당신 탓도 아니고 내 선택이니까 후회는 없어요. 프로파일러가 한 입으로 두말해선 안 되는 거 알죠?”
“몰랐는데요. 하기야 그쪽이라면 마음 굳힌 일은 그대로 밀고 나갈 것 같았어요. 내 프로파일링도 3일로 충분했다면서요?”
“그런가요? 뭐, 죽고 싶어서 희대의 살인마를 맡았으니 저지르고 보는 성향도 있긴 하네요.”
“그렇지만 결국 죽진 못했잖아요, 당신.”
“네, 누가 제대로 못 죽여줘서 말이죠.”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낯에 장난기가 서렸다. 잠깐만요, 그건 당신이, 하고 칼이 반박하려던 찰나 에시타가 말을 덧붙여 그의 입을 막았다.
“맞아요. 내가 겁쟁이여서 죽지 못했죠. 막상 당신이 목을 조르니까 숨도 막히고 무섭더라고요. 유언을 제대로 남기지 못한 것도 있고….”
어떤 유언을 남기려 했는데요? 그 물음이 커피의 잔향과 함께 입안에 머물렀다. 이대로 가다간 카페 창 너머로 런던의 동이 틀지도 모른다. 칼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걸으면서 얘기하죠. 맑은 날씨의 상쾌한 공기도 맡을 겸.”
둘의 발걸음은 파도처럼 고르게 이어진 돌길에 닿았다. 아직 날이 밝아 켜지지 않은 가로등은 새까만 칠이 조금씩 벗겨진 채 일렬로 자리하고 있어 고즈넉한 느낌을 주었다. 그들은 나무들 사이를 걸어 나가며 천천히 숨을 들이켜고 내뱉음으로써 곳곳에 만연한 싱그러움을 음미했다. 햇빛이 뺨 위에서 제 몸을 털어내면 햇살 특유의 포근하고 따뜻한 냄새가 났다.
“아까 물어보려던 건데, 만약 유언을 쓰거나 말할 시간이 있었다면 어떤 유언을 남기려 했습니까?”
그때였다. 질문 내용이 밝지 않다는 걸 하늘이 눈치챈 건지 그들의 발 앞에 빗방울 하나가 툭, 떨어졌다. 그것을 기점으로 돌바닥에 새까만 점이 점점 늘어나기 시작했다. 어느새 빗줄기가 되어버린 빗방울은 공백 하나 없이 바닥을 촘촘히 채워나갔다. 신기하게도 햇빛은 여전히 거리의 모든 것을 간지럽히고 있었다. 물기 어린 돌바닥과 계속해 내리는 비는 그런 햇빛을 머금고 반짝였다. 환한 거리에서 별처럼 총총거리는 반사광은 마치 밤을 품은 낮과 같았고 그 광경이 실로 아름다웠던 것은 사실이다. 단, 문제가 하나 있었다. 에시타와 칼은 이런 갑작스러운 비에 준비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왜 갑자기 비가…!”
당황한 에시타는 질문에 대한 답 대신 칼의 소매 끝을 잡고 비를 피할 곳을 찾기 시작했다. 원체 뛰는 것에 익숙하지 않았던지라 어설프게 움직이는 그녀를 본 건지 어느샌가 칼이 에시타를 이끌고 있었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걸음으로 그들은 공원에서 울창하게 자라난 나무를 찾아냈다. 그 아래로 겨우 비를 피해 숨을 돌릴 즈음 둘의 시선이 마주쳤다. 예상치 못한 비의 습격에 우왕좌왕하던 본인들의 모습이 떠올랐는지 웃음이 절로 터져 나왔다. 선명한 웃음소리가 빗소리를 뚫고 나갔다.
“일기예보는 역시 순 엉터리네요!”
조금 들뜬 에시타가 달뜬 숨과 함께 한마디 내뱉었다. 칼이 자신의 굽이치는 머리카락을 적신 빗물을 털어내며 응했다.
“그러게 말입니다. 이래서 기상청은 믿을 게 못 된다니까요. 그래도 잘된 거 아닙니까? 사형대는 이미 벗어났으니 지금 내리는 비는 우리에게 자유롭고 개운한 느낌을 주니까요.”
“아무리 자유롭고 개운해도 물에 빠진 생쥐 꼴이면 어떡해요? 이대로 비가 그치지 않으면….”
에시타의 말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그제야 비와 빛이 만들어낸 아름다운 풍경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빛을 함빡 담은 보석을 실오라기로 섬세히 짜낸다면 이런 모습이었을까. 빗방울이 닿은 곳곳은 자신이 가장 빛난다는 듯 반짝거림을 자랑하고 있었다. 계속되는 비에 저마다 우산을 펼치거나, 버스에 오르거나, 상점 안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이 보였다. 어쩐지 시간이 천천히 흐르는 것 같았다. 눈을 깜빡일 때마다 마음 깊숙한 곳에 자리한 회중시계 초침이 늘어지는 착각마저 들었다. 느긋한 일상이 만든 영화의 한 장면에서 에시타는 삶을 읽어냈다.
“다시 살아가게 된 걸 축하해요, 칼.”
문득 그녀가 그렇게 말하자 함께 타인을 관찰하던 칼의 고개가 돌아갔다. 그의 입가에 호선이 깊게 그어졌다.
“나 혼자 힘으로 되찾은 생도 아닌데요, 뭘. 끝까지 날 놓지 않고 질문해주어 고맙습니다.”
“날 살려줘서 고맙다, 고 말해도 되는 거 아닌가요?”
“그거랑 다른 문제죠. 단순히 날 살려줘서 고마움을 느끼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그래도 꽤 많은 대화를 나누었고, 그 과정에서 그쪽이 나에게 직접적 해를 가한 적이 없잖아요?”
“그러니 간단한 의미로 고맙다 하는 건 아니다, 이거군요.”
“예, 그겁니다. 딱딱 알아채는 게 역시 탐정도 잘할 것 같은데요.”
“탐정 자리 조심하시라니까요. 내가 언제 칼의 자리를 뺏을지도 몰라요.”
장난스레 말하는 그녀를 바라보며 칼은 속으로 내심 죽고 싶어 하는 사람이 농담은, 이라고 생각했다. 그녀의 유언을 듣고자 했으나 자꾸만 미뤄지는 상황을 바라보며 질문을 던져 답을 요구하는 프로파일러보단 직접 답을 파헤치는 탐정이 역시 자기에게 더 맞겠다는 확신도 했다.
한차례 대화가 또 한 번 갈무리되면 그들은 어느새 비가 그친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하늘은 한껏 끌어안고 있던 햇빛과 비를 쏟아내는 데에 지친 건지 비와 함께 해까지 집어삼키려 했다. 녹음 진 잎사귀는 늦은 오후의 빛깔이 더해져 깊은 호박색을 띠고 있었다. 다시 움직일까요. 짧은 제안과 함께 에시타는 공원 길에 맞춘 돌단을 밟고 올라섰다. 그녀의 옅은 회색 머리칼 역시 잎사귀처럼 물들어 금빛으로 산개했다. 칼은 그녀보다 한 걸음 늦게 걷기 시작했다. 코트와 머리카락, 눈마저 칠흑색이었던 그는 노을 녘으로 물드는 모든 것 사이에서 상당히 이질적인 존재였다. 그러나 앞서 걸어가는 에시타의 그림자 안에 자리하는 순간 칼은 누구보다 풍경과 어우러졌다. 돌단에 올라 시선이 높아진 에시타가 칼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처음이에요.”
“뭐가 말입니까?”
“갑작스러운 비에 달리려고 노력한 것도, 이렇게 공원의 돌단 위에 올라서 누군가를 내려다본 것도 처음이에요.”
“그게 그렇게나 놀라운 일인가요? 누군가에게 말할 정도로?”
“신기해서 그래요. 일에 치여서 인간관계라고는 제대로 사귀지 못한 나라서요. 당신이랑 함께 있으면 이것저것 새롭게 경험해보는 것 같아 기분이 묘해요.”
“하기야, 사람 12명 죽인 살인마를 옹호하는 것도 희귀한 경험이죠. 그리고 그럴 땐 묘하다고 하는 게 아니라 고맙다고 하면 됩니다. 아까 나처럼 말이죠.”
“일단 당신을 옹호하려던 건 아니거든요. 진실을….”
“알아요. 진실을 밝혀내고 본인은 그 진실을 세상에 내놓는 것뿐이다.”
“...네.”
“그렇지만 그저 진실을 세상에 보여준 게 아니잖아요. 보여줬음에도 세상은 내게 죽으라 외쳤어요. 그런데도 당신은 자기가 파헤친 ‘진실’대로 내가 죽어 마땅한 사람이 아니라 했죠. 보여주는 데에서 그치진 않았다고 보는데요.”
“탐정은 원래 그렇게 말을 잘해요?”
“프로파일러랑 나름 비슷하죠?”
“얄밉네요.”
얄밉다고 말하는 에시타의 낯은 전혀 얄미워하는 표정이 아니었다. 오히려 미소가 그녀의 입가에 감돌고 있었다.
“고마워요. 당신 덕에 많은 생각을 했고, 또 새로운 경험도 많이 해보게 되네요. 난 동생을 잃고 나서 얼굴을 사건 파일에 파묻은 채 죽음과 죽임의 행위에 집착했죠. 그래서 더욱 시야가 좁아졌던 걸까요? 수많은 살인마의 목숨을 저울질하면서 오만해졌을지도요.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서서, 세상을 삐딱하게 바라보는 시선이 정답이라고 생각했던 거죠.”
칼은 묵묵히 에시타가 이어나가는 말에 집중했다. 취조실에서 그가 으레 그랬듯 말이다.
“정말…. 많은 생각을 했어요. 지금도 안 한다고 할 순 없지만, 이렇게 걷고 있으니 생각이 조금 덜어지는 기분이라고 해야 할까요.”
“내게 이렇게 많은 이야기를 건네는 걸 보니 당신은 생각도 생각이지만 제법 수다쟁이 같은데요.”
“카알….”
“하하, 알았어요. 계속 듣고 있을게요.”
“당신이라서 말이 많아지는 거라니까요.”
그 말을 하고 잠깐 입을 다물던 에시타는 말을 덧붙였다.
“다른 동료들에겐 이렇게 말을 길게 해본 적도 없고요. 그리고 내가 할 말은 이제 끝이에요. 당신 얘기도 해주지 그래요?”
“무슨 얘기를 할까…. 난 할 말이 크게 없는걸요. 앵무새처럼 같은 말을 5번씩이나 반복할 수 있는 프로파일러를 만나 7일간 왕창 취조당했거든.”
유하게 휘어진 눈꼬리가 칼을 향했다. 째려보는 눈매를 의도했음에도 그를 바라보고 있는 에시타의 얼굴은 날카롭기보단 부드러운 쪽에 가까웠다.
“그럼 됐어요. 그냥 말없이 걷기나 하죠.”
돌단이 끊겼을 즈음 그녀는 행여 몸이 휘청일까 발을 내리는 속도를 늦췄다. 그 사실을 칼이 눈치챘는지 먼저 손을 건넸다. 악수를 건넸을 때처럼 말이다. 그는 친절한 이가 아니었으나 때론 영국인답게 신사적인 태도를 보였으며 우호적인 상대에게는 예를 갖출 줄 알았다. 그렇게 발이 땅에 닿는 순간보다 손이 손을 잡는 순간이 앞섰다. 눈매가 짙고 피곤한 기색을 늘 달고 다니던 그의 인상과는 달리 큼직한 손은 온기가 서려 있어 에시타는 저도 모르게 안정감을 느꼈다. 가볍게 내디딘 발걸음이 돌단에서 지상으로 내려오자 다시 그녀의 시선이 상대방보다 낮아졌다. 조금은 넓게 들어오던 시야 역시 좁아져 눈에 드는 것들이 전부 가깝게 보였다. 무엇보다 눈에 드는 것은 당연하게도 옆에 서 있는 칼이었다. 그래서, 그런 탓에, 손을 언제 놓아야 할지를 가늠치 못했다. 그렇지만 심판을 내려야 할 이도 기다리는 이도 없는 이 상황에서 성급할 이유는 없었다. 에시타는 속으로 천천히 초를 세며 미끄러지듯 자길 보조하던 손을 흘려보냈다. 둘은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거리를 유지하며 런던의 전경이 보일 만한 곳까지 올랐다.
초저녁 바람이 두 사람의 머리를 가볍게 흐트러뜨렸다. 노을은 도심 가장 아래에서 손을 걸치며 작별 인사를 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높디높은 건물을 감싼 창들이 하나같이 붉게 타올랐다. 이른 감이 있음에도 즐비한 가로등이 하나둘씩 켜지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신기하게도, 그들의 발걸음은 춤을 추기 위해 밟는 스텝처럼 가벼워졌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런던을 감도는 일상적인 소음들이 갑작스레 들리지 않았다. 적막 속에서 둘은 안온을 느꼈다. 음소거된 도시에서 시선을 옮긴 것은 비단 한 명만이 아니었다. 칼과 에시타, 에시타와 칼, 두 사람이 눈을 맞추었다. 그제야 다시 세상이 내는 모든 소리가 그들의 귀에 닿았다―버스가 이동하는 소리라던가, 사람들의 수다 소리, 잎사귀가 흔들리는 소리…. 그것은 마치 어두운 심해 속에서 수면으로 올라와 호흡을 튼 것과도 같았다. 죽음에서 돌아왔다. 아무도 기억하지 않지만, 그 둘은 분명 그러했다.
“어쩌다보니 여기까지 왔네요. 누가봐도 곧 헤어질 시간인데, 인사 대신 질문도 받습니까? 계속 물었지만 제대로 된 답을 듣지 못해서요.”
“물론이죠.”
“당신의 유언이 듣고 싶습니다.”
“그건 질문이 아니라 요구잖아요?”
“뭐, 그게 그렇게 되네요.”
뻔뻔한 칼의 어투에 에시타는 고개를 저어 보이다가도 한걸음 다가섰다.
“어렵진 않네요. 나는, 이렇게 말했을 거예요.”
잠깐 말을 고르던 그녀가 소리 없는 숨과 함께 ‘유언’이라 불렸을 것을 말했다. 펜으로 적어가는 것이 익숙했던 그녀인 만큼 그 목소리는 조용했다.
“인간은 무엇을 이유로 살아갈까요? 내겐 소중한 이도, 나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이도 없어 남길 게 존재치 않습니다. 그러니 죽음을 맞이하기 전, 난 끝까지 이에 대한 고찰을 해보렵니다. 따라서 이것은 유언이 아닌 내 삶에 대한 한탄이 되거나, 혹은 쓸데없이 길게 늘여놓은 철학적인 말이 될 수도 있겠죠.”
“사람은 지상에 있는 산 것 중 가장 많은 감정을 품을 수 있다고 하죠. 슬픔, 애환, 기쁨, 희망, 고통, 분노…. 어쩌면 그 모든 감정이 사람을 살게 하는 이유일지도 모릅니다. 반대로 그것은 사람을 손쉽게 죽이는 방법이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감정이 없으면요? 그것은 인간은 살게 할까요, 아니면 죽게 할까요? 난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된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어떤 일을 맞이하고 어떤 사람을 만나든 간에 사랑을 느낄 수 없고, 증오를 느낄 수 없다면…. 제아무리 살아있는 사람이라고 한들 그가 사는 건 삶이라 부를 수 없습니다.”
“난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후 죽어 마땅한 자들을 모조리 죽이고 싶었습니다. 또 죽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죽음에 집착하니 점점 감정을 잃어갔습니다. 내 안을 불태우던 분노는 잿더미 같은 초연함이, 내 속을 헤집던 슬픔은 해소될 수 없는 갈증이 되어 사막처럼 말라갔습니다. 그래서 나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었습니다. 소멸하고 싶었습니다. 사람이 호흡 한 번으로 죽는 존재였다면 단언컨대 난 세상을 둘러싼 모든 공기를 들이켰을 겁니다.”
“그러나 죽는 게 두려워 지금까지도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 이쯤 되어서 다시 한번 말해보죠. 사람을 살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감정입니다. 난 두려움도 감정에 속한다는 사실을 잊고 있던 겁니다. 하여 두려움만을 내던진다면 끝내 내가 바라던 죽음을 맞이할 수 있을 겁니다. 이 유언을 말하는 지금도 난 두렵습니다. 인간의 원초적인 본능과도 같은 것이겠죠. 어쩌면 나의 바닥에 잔재하는, 살고 싶다는 욕구가 조금이라도 시간을 벌기 위해 발버둥치는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어쩌겠나요? 오늘 나는, 죽음을 맞이할 겁니다. 그러니,”
그 순간 독백 같은 유언이 멈췄다. 말을 이어나가는 대신 그녀는 자기 앞에 서 있는 칼의 양손을 잡아 올렸다. 왜 그랬는지는 그녀도 이해하지 못할 일이었다. 다만 그 움직임에 망설임이나 무거움이라고는 한 치 없었다. 이어지는 그녀의 목소리도 하늘을 맴도는 구름처럼 가벼웠다.
“나의 유언을 보고 있을 당신, 당신은 눈을 감더라도 호흡하길. 노을은 지고 있으니, 아침 해가 오라고 속삭이길. 삶이라는 축복을 기꺼이 누리길.”
웃고 있었다. 에시타는 누구보다 환한 낯으로 웃고 있었다. 그 웃음마저 그녀의 유언이었을지, 아니면 작별 인사를 대신하는 것에 불과했는지는 아무도 몰랐을 일이다.
칼은 자기 손을 잡은 손을 내려다보다가 웃는 얼굴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그 뒤로 도시의 전경이 펼쳐졌다. 해가 꺼지고 있는 하늘은 아름다웠다. 그것도 무척이나. 기나긴 유언을 듣고 그는 생각했다. 어쩌면 그녀는 모순적이게도, 죽음을 원하는 만큼 삶의 아름다움을 알고 있을 것이라고. 다시 살아가게 된 걸 축하해요. 그녀가 건넨 한마디가 계속해 머릿속에 감돌았다.
그리운 향취가 허공을 채웠다. 단 하루, 하루의 재회였을 뿐인데도 말이다. 하지만 두 사람은 이제 알고 있었다. 그것은 자신들이 되찾은 삶의 향이었다.